세도정치란 왕실의 근친이나 신하가 강력한 권세를 잡고 온갖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정치입니다.
정조 이후 왕들은 힘이 없는 왕들로 이어져 결국 왕의 측근들이 정치적 권세를 누려 부정부패가 심화되는 세도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정조가 가장 믿고 의지 하였던 홍국영도 정조의 힘을 얻어 영원한 세도정치를 꿈꾸었던 인물입니다.
홍국영은 어쩌다가 영원한 세도정치를 꿈을 키웠고 그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자료 출처: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1. 홍국영이 정조를 만나다.
홍국영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같은 풍산 홍씨 명문 집안 출신으로 1748년에 태어났습니다.
홍국영은 25살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좋은 점수받지 못해 바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처음 시작한 관직은 사관이었습니다. 항상 영조 옆에서 기록하는 일로 홍국영은 눈치가 빨라 영조에게 이쁨을 받았다고 합니다. 홍국영의 외모에 대해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아마 준수한 외모로 호감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관 생활을 하면서 그는 정조와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년 후 홍국영은 정조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시강원 사서에 임명이 되었습니다. 시강원에서 홍국영이 하는 일은 정조가 읽는 책들을 정리하고 정조가 찾는 책을 찾아서 갖다 주는 역할이었습니다.
홍국영은 일적으로 정조를 가까이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정조는 홍국영에 대한 호감도 이전부터 있었고 나이대도 비슷하여 홍국영을 가까이하였습니다. 또 항상 궁 안에 있는 정조는 홍국영을 통해 궁밖에 일들을 알 수도 있었습니다.
2. 홍국영이 세손 정조를 지키다.
세손 시절 정조는 가끔씩 영조에게 학문적인 테스트를 예고 없이 받았는데 어느 날 영조가 찾아와 정조에게 요새는 무슨 책을 읽느냐는 물음에 "자치통감강목"이라는 중국역사책을 읽는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 중국의 왕이 가족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내용이 있는데 영조 입장애 서는 형을 죽인 혐의가 있고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으니 그 내용이 불편하였습니다. 영조는 정조에게 그 내용을 읽은 소감을 얘기 해보라고 하였는데 정조는 영조의 심기를 눈치채고는 읽고 싶지 않아 그 부분을 찍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대답을 들은 영조는 그 책을 가져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정조의 거짓말이 들통이 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서였던 홍국영은 영조가 책을 같고 오라는 명을 듣고서는 그 부분을 재빨리 찍어서 영조에게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홍국영의 눈치 빠른 행동으로 정조는 위기상황을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홍국영은 정조가 위기가 올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정조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775년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게 하려고 하자 홍인한, 정후겸 등이 대놓고 극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주변에 사람을 시켜 반대 사서를 올리게 하여 영조와 정조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대신들은 정조가 왕이 된다는 것이 매우 불편하였습니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그들은 찬성을 안 했다고 하여도 극심하게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인데 그들의 마음을 매우를 복잡하였을 것입니다.
대 놓고 반대하는 홍인한과 정후겸에 정조는 아무 대응을 하지 못하였을 때 홍국영은 서명선이라는 인물에게 부탁하여 극심히 반대하는 홍인한과 정후겸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합니다.
영조는 서명선의 상소를 명분을 삼아 정조의 대리청정을 확정 짓고 대리청정을 반대한 대신들의 직위를 빼앗아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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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조는 믿을 사람이 홍국영뿐이었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한 지 3개월 뒤 영조는 세상을 뜨고 1776년 4월에 제22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정조를 도왔던 홍국영은 바로 왕과 밀접한 기관인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이 됩니다.
어느날 정조에게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홍국영의 비난과 멀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크게 화를 내며 상소문을 쓴 자를 잡아 고문에 가까운 심문을 하여 홍인한과 정후겸 일파들이 홍국영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자백을 받게 됩니다.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의 일파를 잡아들여 고문을 하였고 얼마뒤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하고 맙니다.
이 사건 이후로 홍국영의 위신은 더 높아지고 승정원 도승지로 승진하게 됩니다. 홍국영은 도승지뿐만 아니라 규장각 직재학으로 규장각의 2인자격 직책을 주었고 국권인 수어청 대장으로 임명하고 얼마뒤 도성 내부와 궁궐을 지키는 금위영 대장직도 주었습니다.
어렵게 왕으로 올라온 정조에게는 홍국영 말고는 신뢰할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4. 오만해지는 홍국영
정조가 즉위한 지 1년 뒤에 정조의 처소까지 들어와 정조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조는 항상 암살 위협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홍국영이어서 정조를 24시간 경호하는 숙위대장의 직책까지 주게 됩니다.
홍국영은 정조의 안전을 위해 경호뿐만 아니라 검문 시스템을 만들어 정조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홍국영이 한번 검문하고 왕을 만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홍국영은 문고리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쥔 홍국영은 교만해져 대신들의 불만은 터져 나왔지만 정조는 홍국영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문고리 권력으로 홍국영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홍국영은 점점 더 기고만장 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왕의 여인인 궁녀들을 희롱하고 간음하는 만행도 일삼았습니다.
홍국영의 오만한 세력은 점점 더 커져 갔지만 정조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5. 영원한 권력 세도정치를 꿈꾸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만들어 왕실의 외척이 되고 싶었습니다. 또 아직 후사가 없는 정조의 아들을 여동생이 낳아주면 왕으로 만들어 자신의 권세를 꾸준히 지켜나갈 수 있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홍국영의 계획대로 여동생은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의 여동생은 후궁이 되자마자 아들도 안 낳는데 후궁의 최고의 위치인 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또 왕과 비에만 쓸 수 있는 으뜸원 (元)인 "원"자를 넣어 "원빈"이라는 칭호를 여동생에게 붙이게 됩니다, 그만큼 홍국영이 왕실에 까지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빈인 홍국영의 여동생은 1년 뒤 후사 없이 사망하고 맙니다.
그의 꿈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홍국영은 여동생의 사망에 이성을 잃어 정조의 부인인 효의왕후가 독살하였다고 생각하고 효의 왕후를 모시는 궁녀들을 잡아와 심한 고문을 하였습니다.
홍국영은 정말 선을 넘은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선을 넘은 홍국영을 보고는 여동생을 잃은 슬픔이 커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라면 이번만은 참는다며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홍국영 사라진 꿈을 어떻게든 잡고 싶어 이상한 계략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홍국영은 정조와 죽은 여동생사이에 양자를 들이려는 계략을 왕실의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진행을 하게 됩니다, 정조의 배다른 동생 은언군의 아들 이담 즉 정조의 조카를 정조의 동의도 없이 양자를 들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홍국영은 정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게 후궁을 들이는 일을 막아버렸습니다.
양자로 들이려는 정조의 조카 이담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이 결국에는 문제가 되고 맙니다.
"완풍군"이라는 이름인데 이름 속에 뜻은 "완"은 왕실의 이 씨를 뜻하고 "풍"은 완풍 홍 씨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이 씨의 왕족과 자신의 풍산홍 씨의 결합을 뜻하는 이름이었습니다. 홍국영은 은밀히 나라의 근본을 옮기려는 계책이었습니다. 결국 홍국영은 양자인 완풍군을 앞세워 세도정치를 펴 자신의 권세을 영원히 누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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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홍국영의 결말은 허무하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펼쳤던 홍국영이 갑자기 정조에게 스스로 사직을 청하게 됩니다.
정조의 왈 간밤에 홍국영이 찾아와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마 그 밤에 정조와 홍국영의 은밀한 애기가 오고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홍국영의 사직으로 결론을 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을 받아들이고 다시는 도성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그는 도성에서 쫓겨나 강릉까지 유배를 가게 되고 1781년에 34살 젊은 나이에 꿈을 이루지 못한 채로 병사로 죽고 맙니다. 홍국영은 정조의 힘을 얻어 누렸던 권력의 기간은 불과 4년이었습니다.
홍국영이 기고만장한 만행을 하는 동안 정조가 만든 규장각에서는 정조의 사람들인 젊은 인재들이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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